<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月岩里는 달바위 전설을 안고 있는 일로읍 중심 소재지로서 일제강점기에 일로역이 개설되어 각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과거에는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회인동,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모두 8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황소안,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동, 다복동, 중앙동, 연소동, 읍동 취락촌 등 11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본래 무안현 노촌면의 지역이었으며 1910년에는 잠시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현리, 덕암리, 부광동, 회인동 일부와 이로면의 남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월암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호구총수에는 월암리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4년 일본에 의해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비로소 월암리 등이 나온다. 일로장이 있으며 사회복지기관인 소전원이 있다. 월암마을에 천안전씨삼강비가 있다. 강남산에 나주정씨 효자각과 경모재가 있으며 연소동 마을 입구에 백범선생 관련 두 기의 비가 있다.

▲ 일로 월암 마을 전경

달바우 마을

월암은 월암4리에 속하는 마을로 200여년 전부터 천안전씨 김해김씨 등 십여 호로 형성되었다. 이후 천안전씨나 김해김씨 등은 다른 마을로 이주하고 현재는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최초의 입향조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로면 내화촌(현재는 목포시 삼향동 내화촌)에서 이주한 나주정씨 정순섭(자-봉원. 1892-1981)이다. 공은 일로역 보선사무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이 마을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룬 것이다. 마을유래지에는‘나주정씨 정봉원이 1886년경 삼향면 하당에서 이주했다. 정씨가 이곳에 이주할 당시 노씨 김씨 임씨 등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월암이란 지명은 우리 지역에 많이 있는데 이 마을은 서쪽 등성이에 있는(현재 일로초등학교 안) 달바위에 의해 월암이라 이름 하였다.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후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 비로소 월암리가 나온다.

월암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일로읍 소재지는 일본세력이 진출하기 전에는 매우 한적한 농촌 취락지였다.

915년 지적원도를 보면 역전통 부근에서 대지는 3개 지번밖에 없었고 일로초등학교 부근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가 철도역과 면소재지를 월암리에 설치하면서 신흥 중심취락으로서 기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1900년대 초에 죽산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이 마을로 옮기고 1922년 일로보통학교 그리고 금융조합과 1937년 일로우편소가 마을에 들어서면서 마을이 커졌다.

 이처럼 일로읍에서는 마을이 제일 성해 한때는 마을에 두 사람의 무당이 자리 잡기도 했다.

사람들은 일로읍에서 제일 좋은 터 두 자리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토지개량조합이 있는 자리이고 또 하나는 이 마을의 보해상사가 있는 자리다.

보해상사 터는 예전에 죽산리에 있었던 면사무소가 옮겨 온 자리이기도 하다. 또한 보해상사 앞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옹기배가 다녔던 선착장이기도 하였다.

1920년대 영화농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사 주변을 파면 수많은 옹기 파편들이 발견된다.

이 상사 앞에서 무전산까지 둑이 있었는데 지금도 주민들은 둑방길이라 부른다.

▲ 일로 월암마을 보해상사

인심이 좋고 넉넉한 마을

마을에는 천안전씨의 흔적이 크게 남아있다. 마을회관 앞에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천안전씨 삼강비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인데 그 안에 효자비나 열부비는 없고 1864년에 세워진 어사단서라고 쓰여진 全 龍의 충신비(향교지에는 전용당으로 표기 되었다)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이 삼강문의 주인공들은 다음과 같다.

충신 전 용은 임진왜란 시 선조께서 의주 피란길에 오를 때 호종을 하면서 공을 세웠다. 그 후 秋官 벼슬을 제수 받고 33년 후 갑자년에 靖社勳臣에 기록되고 鐵券을 하사받았다.

열부 탐진 최씨는 전 용의 7대손인 전인익의 처로서 매사에 법도와 의례에 벗어난 적이 없으며 남편의 병환이 위급하자 두 차례나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공양하였다.

효자 구상과 경상은 당시 어렸으나 어머니가 자신의 살을 베어 아버지 병구환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시게 해 부친을 회생시켰다.

또한 마을에 전씨 소유의 6칸 ㄷ자 형의 큰집이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현재는 많이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전씨의 후손들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로 경방대장(현재의 소방대장)을 맡았고 해방 이후에는 대동청년단의 간부를 맡아 활동을 하였다. 

마을에는 교장 교수 등 교육계 인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한 일로 문화상품의 대명사인 품바 타령의 1대품바인 정두수의 고향이기도 하다. 정두수의 부친 또한 마을에서 조리중(농악이나 오광대놀이에 등장하는 인물로 중의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사람)으로 불려질 정도로 뛰어난 예인이었다.

마을 이름이 되기도 한 달바위는 일로초등학교 안에 있는데 예전에는 학교 옆 등성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바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바위 때문에 남창천 건너 삼향읍의 용포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여겨 문제가 생겼다.

해서 용포 사람들은 바위를 세우지 못하게 하고 월암리 사람들은 바위가 서야 마을이 잘 된다고 믿고 세우려고 한데서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달바위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 가리게 되었는데 현재는 대나무는 없고 바위도 일로초등학교 안에 놓이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월암이 일로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 중에 하나라고 자랑한다. 주민들이 텃세가 없어 외지인들도 쉽게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고 주민들의 화합이 잘 되어 다투는 목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깡샘을 비롯한 4개의 샘이 있었다.

▲ 일로 월암마을 천안전씨 삼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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