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운남동, 저동, 자작, 양곡, 연동, 내화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연리는 본래 영광군 망운면에 속했다.

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화촌, 양곡동, 저동을 합하여 연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망운면과 분리되어 운남면에 속하게 됐다. 지형이 연꽃 같다 하여 연리 또는 연동이라 했으며 운남면 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809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저동에 충효사, 양곡에 고인돌 군락지가 있으며 운남동에 효자각과 열녀각이, 내화촌에 여러 기의 고인돌과 절부각이 그리고 자작 마을에 열부각이 있다.

▲ 저동마을 전경

▲모시가 많은 갯벌이란 뜻의 모시울 마을

▲ 저동마을 규석 채취 현장
저동은 연2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 형성 당시 이 곳 갯벌에 모시가 많이 자생해 있었기 때문에‘모시가 많은 갯벌’이란 뜻으로‘모시개’또는‘모시울’등으로 불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모시밭이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모시밭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모시를 째고 모시를 삼았던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서 일손이 많이 들었던 몹시 힘든 작업이었다고 회상한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毛時村으로 나온다. 이는‘모시울’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쓰여진 글자로 보인다. 이어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서 현재의 이름인 망운면 苧洞으로 나온다.

이 마을은 원래 평산 신씨 터였으나 하동 정씨 들이 들어오면서 정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예전에 마을은 대나무와 소나무가 2중으로 둘러싼 아늑한 분지형으로 소쿠리 형이었다. 또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촌락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간척이 이루어지고 주변이 전부 개간되어 황량해 보인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하동 정씨 鄭時哲(1704-1786, 자-세용, 호-운천)이다. 공은 함평 자풍에서 세거하다 1700년대 중반에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웃 노인들을 초청하여 극진히 모셨고 부모의 사후에는 3년간 시묘생활을 하여 주변에 효성의 본이 되었다. 후에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 그의 이러한 효행이 유림들의 추천을 받아 현재 충효단에 향사되고 있다.

이 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으며 망운면 송현을 바라보는 바다 쪽으로는 저동제방이 바닷물을 막고 있다. 두무골(감난골 또는시목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리건너(진천동 또는 참샘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동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옆으로는 둔전-신월 간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에 참샘골이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로 물이 좋아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물 걱정을 하지 않았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물이 풍부한 이 마을을 대단히 부러워 했다. 마을 앞에 있는 저수지는 일제 말기 막기 시작하여 해방 후에 완공되었다. 요즈음 그 저수지 밑에서는 유리의 원료가 되는 규사와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점토를 채취하고 있었다.

▲충효당 8경이 있어

▲ 충효당 8경
마을 위쪽에는 두 분의 충신과 일곱 분의 효자[二忠七孝]를 모신 忠孝祠가 있다. 이 사우는 忠孝壇으로부터 비롯된다. 충효단은 1906년에 김씨, 기씨, 정씨, 이씨의 4姓 6人이 모여 선대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에서 단을 세우고 2忠 7孝를 모셨다. 1916년에 9인의 단비를 세우고 1917년과 1921년에 개수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사우로 개축한 것이다. 9인의 단비는 사우 건립 시 매몰되어 현존하지 않으며 충효사안에 9개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우의 정면 좌측에 1916년에 세운‘충효단 비명’이 있으며 비문에는 기우만 선생이 찬한 글이 새겨져 있다.  

충효사는 삼문을 지나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시멘트 기둥의 맞배 지붕이다. 바로 밑에는 강당인 淸節堂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중‘忠孝堂八景韻’이라는 현판에는 충효당 주변의 경치를 읊은‘군유만세, 승달천년/ 진천모우, 취엽청풍/ 연당야월, 송현장춘/ 호암낙조, 학동귀운의 싯구가 걸려있다.

이곳에 향사되어 있는 충신 정기린은 선조 때 임란 공신으로서 이 마을 입향조의 5대조이다. 함평 자풍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으나 후손들이 이곳으로 모셔 와 충효단에 향사했다. 또한 이 마을 입향조인 효자 정시철의 위패도 있다. 매년 2월에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마을유래지의 기록이나 주민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 마을에서 특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즉‘마을에 7-800년 되는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는데 어른들 기준으로 네 아름이 훨씬 넘는 크기였다고 한다. 그 나무의 중간에 구멍이 생기면서 물이 고였는데 그 물을 마시면 불치의 병 등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졌다고 한다. 또한 이 나무로 인해 천연두 등 전염병이 마을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관리 부족으로 67년 68년 대 旱害 때 말라 죽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당시 약수를 떠갔던 주민들은 나무 앞에 복전을 바치고 예를 표하고서 물을 떠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운남에서는 드물게 양반촌이었다. 마을의 위치 뿐 아니라 문장가가 많이 나왔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른바 똑똑한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입어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실지로 광복 이후 불거진 운북과 운남의 이념 갈등에서 이 마을에서는 20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하루 해방’이라 부르는 날에 좌익세력에 의해 운남 지역에서 대규모의 살상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었다.

허천개 지작골 신남골 샘사골 사랑 건너 안산 영골 채분골 생가골 몽장골 각골 삼각골 산지등 안밭 진골 거룽 중샘께 저건너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저건너는 절터였던 자리로 중이 먹는 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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