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복룡리는 청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4㎞에 위치한다. 남쪽에는 학두봉 서쪽으로는 강정리 동으로는 송현리와 접하고 있다. 용수동과 대곡 등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는데 복룡이란 지명은 지형이 용이 엎드리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장자산과 복룡촌으로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에는 일서면 장재산 대곡리로 나온다. 1914년엔 청계면 복룡리 복룡동 용수동 장재산 대곡으로 이후 같은 이름으로 나온다. 용수동에 임장자 전설과 3기의 입석이 있으며 대곡에는 나주정씨 제각과 2기의 고인돌이 있다.

▲ 대곡마을 전경


▲골짜기가 깊은 마을

▲ 대곡교회
대곡은 복룡2리에 속하는 마을로 골짜기가 깊은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지로 마을을 자세히 보면 소태골(솟대골)에서 솔치를 지나 상마를 거쳐 도림까지 이어지는 골짜기를 가지고 있다. 처음 마을이 형성된 곳은 장자산 마을이었다. 마을유래지에는‘800년 전 100호 이상 되는 김해김씨와 전주최씨 주민들이 장자산 마을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었는데 괴질병으로 마을이 폐촌되었다. 이때 일부 사람이 용수동 마을로 이주하고 일부는 장자산 마을 북쪽 골짜기로 이주했으며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한다’.

즉 300여 년 전에 장자산에서 일부 주민이 현재의 마을 뒤 동암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대곡마을로 옮겨 와 살게 됐다. 원래 이곳에는 田씨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살지 않고 묘만 일부 남아있다. 이후 김해김씨와 문씨 그리고 최씨 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김해김씨의 입향조는 金顯周(자-군선, 호-선암, 영조대)로 나주 백구촌에서 세거하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왔다. 예전에 이곳은 초분골로 불려졌던 곳으로 무덤이 많았다.

이 마을은 신촌과 대곡 마을로 이루어졌다. 신촌은 소태골을 말하는데 망맷재 밑으로 예전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마을은 무안의 진산인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매봉의 줄기를 주봉으로 하고 옆으로 천마시풍의 혈처를 안고 있다는 천마산(산재라고도 한다)이 있으며 앞에는 안산이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여건을 보고 이곳을 지나가던 노승은 두 번이나 놀랐다고 한다. 한번은 골짜기 입구에서 이 마을을 보면 좌청룡 우백호가 꽉 짜여 있어서 천하의 명당이 여기에 있다고 놀랐다. 두번째는 마을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뒷산의 맥이 이어지지 않아 기운이 흩어짐을 보고‘아뿔싸’하며 놀랐다고 한다. 마을의 지형은 소쿠리의 와우 형국으로 큰 인물은 나지 않지만 먹고살만한 지역이라고 주민들은 이해하고 있다.

천마산을 보고 주민들은 여수내산 여수내 까끔이라고도 불렀다. 왜냐하면 김씨들이 이 산의 혈처에 묘를 쓰고 여수 고을 원님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파묘해서 흔적이 없는데 지금도 주변 마을의 어른들은 여수내산이라 부르고 있다.

예전에 마을 앞으로는 큰길이 있었다. 강정리나 서호리 복길리 남성리 일부에서 무안으로 갈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해서 사람의 왕래가 많아 주막도 있었으며 고인돌도 많이 있었다. 많던 고인돌은 사방사업과 길 확장 할 때 사용해 현재는 나주 정씨 제각 주변에 두 기의 고인돌만 남아 있다.

▲종교와 관련이 깊은 마을

▲ 김제창과 관련된 자료
마을은 종교와 관련이 깊다. 처음엔 제칠일 안식일교회가 들어서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했다. 그들은 선교 수단으로 마을에 학교를 지어서 아동들을 가르쳤으며 청계에 중앙초등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주변 마을의 아동들도 이곳에서 배웠다. 지금도 주민들은 예배학교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으며 학교당이라는 지명이 마을에 남아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는 천도교의 핵심인물이 있었다. 천도교의 종리사였던 김병화(김제창의 조부)로 전라도 지역의 중요인물이었다.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가 남아있다. 이어서 현재의 대곡교회가 들어섰다. 대곡교회는 큰길 옆에 있었던 대성교회가 전원교회와 나누어지면서 마을에 들어선 것이다. 이 교회에서 구남교회 태천교회(강정제일교회) 상천교회 복룡교회 등으로 또 다시 나뉘어졌다. 또한 이 마을은 6명의 목회자를 배출하기도 했지만 현재 주민들은 교회 신자가 많지 않다.

주민들은 마을 주변의 지명을 따서“놀기 좋다 각시바위/ 바람 잘 든다 진등재/ 물 좋다 들샘골”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각시바위는 천마산에 있는 바위로서 반반한 바위에 두 개의 발자국과 소변을 봤던 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주민들은 여장군이 군대를 지휘하여 올라가던 중 잠시 쉬면서 볼일을 봤던 바위라고 알고 있다. 각시바위 위에는 장군바위와 제비바위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돌을 깨서 사방공사 등 길 확장공사에 사용했다.

들샘은 무안의 3대 샘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무안읍 중사지의 못샘과 청계 청수리의 밤샘 그리고 이곳의 들샘을 말한다. 지리상으로도 이 샘들이 일직선으로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연결된 샘 줄기는 청계 남성리를 거쳐 복길2리로 빠진다. 현재 들샘은 메워져 농지로 사용되고 있다. 예전 들샘 주변을 경지정리 할 때 20여개의 확독을 발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청계면에서 관동 마을과 함께 米質이 좋은 쌀을 생산했다. 해서 주변의 부자들이 이 마을과 관동 마을의 쌀만 찧어다가 먹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물길이 좋아 모든 작물이 잘 자랐기 때문이다. 해서 이 마을 시체는 잘 먹어서 무겁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다.

주민들이 서로 위하고 협조하여 큰 소리가 마을 밖을 넘어가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는 한 사람의 피해가 없을 정도로 서로를 위하고 감싸 주었으며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 줘 넉넉한 인심을 자랑했다. 현재의 마을회관도 주민이 부지를 희사하여 세울 수 있었다.

마을에는 삼문이 있는 팔작지붕의 나주정씨 제각이 있으며 절골 참새골 동암 광대골 진필이 매봉 서당뫼 불당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진필은 마을에서 태봉으로 넘어가는 길이며 절골은 윗절골 아랫절골로 나뉘는데 절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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