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竹山里는 산에 대[竹]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일로읍 소재지에서 남으로 약 2㎞ 떨어진 거리에 있다. 죽산, 양지촌, 당월촌, 도장포, 영화정, 삼천동 등 6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무안현 노촌면에서 이로면을 거쳐 일로면 그리고 일로읍으로 바뀌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화정리, 정월동, 도장동, 양지동, 당월촌, 사량동, 무포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월촌에 자방포 관련 영친왕궁언장비와 경선궁혁폐선정불망비가 있으며 양지촌엔 장흥고씨 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전주 이씨 동족마을

도장포는 죽산4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장수 황씨들이 살았다. 이후 전주이씨들이 망월리에서 분가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전주이씨 동족마을을 이루었다.

입향조는 전주이씨 이득룡(1698-1782)이다. 공에 대한 기록은 전주이씨 대동보의 짤막한 기록 외에는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입향조는 1650년경 전주이씨 이종우로 부친 이항을 따라 전북 남원에서 관동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전남 광산 평동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은 큰동네와 도촌으로 이루어 졌다. 道壯浦란 지명도 조선시대 중기 壯湖(호등 또는 호룡정이라고도 한다)와 道村이 둑으로 연결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둑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 경지정리로 둑이 없어졌다고 한다. 장호는 남자 형국이고 도촌은 여자 형국이어서 둘이 이어져야 마을이 잘 산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도촌에는 대밭이 있어야 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야 마을이 흥 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 속설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당살뫼 산 기슭에는 상당한 두께의 굴 껍질들이 발견되어 바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명처럼 배가 드나들었던 포구였다.

자료를 보면‘일제강점기에 이 마을 주민들은 도장포 마을의 간척지 경작권을 주장하며 일제에 소작료를 내지 않기 위하여 투쟁하기도 하였다. 도장포의 선창은 해발고도가 7m로 선박의 운항이 가능한 곳으로 조사되었다. 우측에 있는 밭은 일명‘선창밭’이라고 하며 주막집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노촌면 도장포리로 나온다. 1912년에는 이로면 도장포동, 1917년에 이로면 죽산리 도장동으로 그리고 1987년엔 일로읍 죽산리 도장포로 나온다.

‘우리 마을이 천국이다’라고 자랑하는 마을

일제강점기 때 일로에서 광암리 광암과 죽산리의 도장포만이 밥술을 뜨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한때는‘밥 바구니에 나락을 담아서 되돌아온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은 이 마을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을에서 일제강점기 때 주민들이 나락을 수확하면서 들판에서 밥을 먹었는데 그때 밥을 담았던 바구니에 주인 몰래 나락을 담아서 가져 온다는 말이다. 정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한 톨의 쌀이 귀한 때라 서로 모른체 하며 넘어가던 때였다.

마을 앞에는 둘레가 520cm가 넘는 당산나무가 있다. 200여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에 주민들은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람이 없어 제를 모시지 못하지만 주민들은 다시 당산제를 지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의 지반이 바위여서 물이 귀해 집집마다 샘을 파놓고 지표수를 받아 생활하였다. 바닥에 바위가 있어 깊게 팔 수가 없는 얕은 샘이었다. 마을에는 세 군데의 공동샘이 있는데 도촌의 옹달샘과 마을 앞 당산나무 밑의 시남샘 그리고 길 가의 큰샘 등이다.

도장포는 자랑거리가 많은 마을이다. 예전부터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 할 정도로 화합과 단결이 잘되었다. 또한 마을에서 혼자 사는 노인들을 위하여 주민들이 공동으로 생일상을 차려 노인공경의 본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민이 喪을 당했을 때도 마을회관에서 거릿제를 지내 주민들 간의 돈독한 정을 과시했다. 2005년도에는 이러한 주민들의 따뜻함이 널리 알려져 훈훈하고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 구현에 기여한 마을로‘좋은 이웃 밝은 동네’의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표정 또한 넉넉해 여유가 있으며 밝았다. 주민들과의 대화에서 한 노인은‘천국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을이 천국이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주부들의 음식솜씨도 좋아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일로 어디를 가 봐도 우리 마을만큼 맛과 정성이 들어가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고 자랑한다.

또한 주민들이 근면하고 검소해 생활은 짜임새와 윤기가 있어 보였다. 전주이씨 동족 마을로 오랫동안 이어왔으면서도 위계를 통한 반목이나 불신의 틈이 없어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한국전쟁 등 나라의 변란이 있을 때도 주민들 간의 갈등이 없어 피해가 없었다. 현재도 마을에 현안이 발생하면 이장을 중심으로 모든 주민들이 나서서 해결하고 있다.

죽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삼거리를 초장골로 부른다. 삼거리에는 영산강 건너 영암과 연결되는 군사작전도로(국지도 49호선)가 지나고 있어 청호 주룡 나루와 이어져 옛날에는 영암 사람들이 일로 장을 보러 다니는 큰길이었다. 이 삼거리에서 주민들은 일로장을 가기 전 초벌로 장을 보아 초장골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76명이 살고 있는 주민 중 21명이 80세 이상의 노인들이다. 지금도 91살의 노인이 김장을 담근다. 주 소득원으로 쌀 농사이나 갓 재배를 하여 소득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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