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柳月里는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방면으로 3㎞ 정도 떨어져 있다. 남으로 현경-해제를 잇는 24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유월리는 조선시대에는 함평현에 속했다가 조선조 말에는 목포부 해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후 1914년 오류동 물암리 월암리 어은동을 합하여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오류와 월암의 이름을 따서 유월리라 불렀으며 지금은 오류 용산 물암 언창 월암 유투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오류동에는 전주이씨 영풍군 파의 납골묘와 영모재가 있으며 용산에는 무안갯벌센터가 들어서 있다. 또한 물암 마을에는 물바위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里의 주산인 니성산에는 목책산성과 여러 개의 금광이 있었으며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다.

 

▲ 유투정마을 전경

 

▲앵소유지의 마을

유투정은 유월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유투 외 신촌 송촌마을로 이루어졌다. 유투정은 유투로도 불려지는데 지명의 유래가 확실치 않다. 주민들도 유투정의 유래를 확실히 모르고 있는데 마을유래지와 주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두 가지 유래가 전해 온다. 

예전에 마을에는 인근에 널리 알려진 샘이 있었다. 샘 옆에는 아름드리가 넘는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샘에 떨어져 있는 버드나무 잎의 모습이 좋아 유투정이라 이름 지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마을 서편에 앵소유지라는 묘지가 있는데 꾀꼬리들이 버드나무 가지를 물고 오다 이 마을에 떨어뜨려 버드나무가 무성해졌다 하여 유투정이라 불렀다는 설이 그것이다. 하여튼 이 마을은 버드나무와 풍수적 지형인 앵소유지(鶯巢柳枝)와 관계가 있다. 앵소유지는 꾀꼬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집을 짓는 형국을 말한다.

이 마을의 세대수는 24호이나 14세대가 다른 성을 사용하고 있을 만큼 各姓받이의 마을이다. 입향조는 상주주씨 전주최씨 곡산연씨 들이라고 주민들은 말하나 확인할 수 있었던 성씨는 상주주씨 뿐이었다. 주씨의 입향조는 주영태(자-장순, 호-암은)로 영광 염산에서 살다가 살기 좋은 이 마을로 이주하였다. 주씨 족보에 의해 추정키로는 1800년대 후반에 이 마을로 들어왔을 것으로 예상된다.

마을유래지에는‘1860년 경에 전주이씨 이찬일이 전남 영암에서 거주하다 이곳을 보고 마을의 좌우측에 어장과 농사를 같이 하면 300년 이상 안주할 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정착하였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문헌으로 살펴 본 이 마을의 변화는 조선시대 자료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가 되어서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柳投亭이라 나온다. 1917년엔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柳投亭, 1987년엔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유투로 나온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 柳投井이라 표기된 것은 잘못 된 것이다.

▲근면하고 부지런해 빚이 없는 마을

마을은 니성산의 맥을 이은 나바릿등을 주산으로 마을 앞은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와 해제, 도리포, 무안, 지도로 가는 사거리가 놓여있다. 나바릿등이란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예전에는 울창한 산림지대였다. 마을 안에는 웃달이 아랫달이로 나뉘어져 있으며 예전에는 당난구지 한뿌리 등과 함께 물암리로 통했으나 지금은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어 유월6리로 독립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위기의 순간을 맞은 적이 있었다. 좌익들이 마을에 들어와 시비를 걸면서 주민들을 죽이려고 했으나 다행히 국군들이 때맞춰 들어와 위기를 넘겼다. 해서 주변 마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으나 이 마을은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다.

마을 주민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에‘백달수 지나갔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람이 지나가면 온전한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주변이 피해를 입어서 생긴 말이다. 백달수는 유명한 마을 깡패였다. 화투와 술 폭력을 일삼는 사람으로서 주민들은 공포에 떨기도 했다.

마을에 유명한 샘이 있었다. 이웃 마을인 당난구지나 한뿌리 용산 등지에서 길어다 먹을 뿐 아니라 마을 앞 농사를 이 샘물로 다 지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 해서 정월보름이면 온 주민들이 나서서 물 지키기에 밤을 새웠다. 특히 겨울이면 모락모락 김이 났던 샘물이 김이 나지 않으면 물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다른 마을에서 물을 타 가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다음해에는 어린아이들도 나서서 물을 지켰다고 한다.

이 마을은 현재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교통의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주막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마을 앞 잿등이라 불리는 곳은 커다란 주막이 있었는데 해제나 지도 사람들이 함평장이나 망운장에 갈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사람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에 이 마을에는 도박이 성했고 뿐만 아니라 사흘에 돼지 1마리를 잡은다 할 정도로 사람들이 넘쳤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말도 많았다.‘벙어리도 이 마을에 오면 말문이 트인다’고 할 정도의 수많은 말들이 떠돌아 다녔다.

이 마을은 가난했던 마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박과 술 폭력 등이 넘쳐났기 때문에 주변에서 이 마을과 사돈 맺기를 지극히 꺼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주변을 개간하면서 농지를 조성하고 마을 앞 바다에서 굴 등을 채취하여 소득을 올리면서 경제에 여유를 갖게 되었다. 주민들이 근면하고 부지런해 해제면에서 유일하게 당난구지와 함께 농협이나 금융기관에 빚이 없는 마을이다. 크게 부유하지는 않지만 넉넉한 마음으로 생활해 얼굴이 편안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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