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해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금산 간척지를 지나 6㎞ 지점에 위치한 창매리는 해제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창매리는 조선시대 영광군 진하산면에 속했으면서 진하산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군에 편입됐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진하산면 蒼馬里로 나온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하산면에 속했던 신월, 명양, 신촌, 창마, 매당, 장동 등의 6개 마을이 해제면으로 바뀌었다.

이곳 창매리는 창마리와 매당리를 합하여 만든 지명이며 현재는 창산, 매당, 매안 등 세 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창산은 철마산이 주산이며 매당과 매안은 중매산이 주산이다. 창산에 광산김씨 제각인 결풍재, 매당에 광산김씨삼강려가 있다.

 

▲ 매안마을 전경

 

■중매산의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

 

▲ 매안마을 뱀새부리
매안은 창매3리에 속하는 마을로 30여 년 전에 매당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작은 중매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앞에는 탄도만의 넓은 바다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에는 새언안과 장구터언안 등 두 군데의 간척지를 안고 있으며 비교적 넓은 농토를 갖고 있다. 매안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중매산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 마을은 월성 昔씨가 자리 잡았던 마을이다. 지금도 석씨 묘로 불리는 여러 기의 묘가 마을 안에 있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석씨들이 3代를 채우지 못하고 절손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후 들어온 성씨가 경주 정씨 鄭台訥(호-눌헌)이다. 자료에 따르면 광주 하방동에서 세거하다(후손은 함평 엄다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살기 좋은 이곳으로 이주했다.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바른 몸가짐으로 주위의 찬사를 받았다. 자연을 벗 삼아 매당리에 정착한 뒤 후손들의 교육에 매진하였다. 그의 후손 중 일부가 옆 마을 보천동에도 있으며 경주정씨 제각은 몽탄면 학산 마을에 있다.

이 마을의 주산인 中梅山은 매당과 매안의 가운데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큰 중매산과 작은 중매산이 있다. 그런데 원래의 이름은 仲始山이었다. 지형상 해제를 받치고 있는 형국이라 한다. 주민들은 4-50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 초하루나 2월 초하루에 중매산 정상에서 산제를 지내고 이어 당산제-샘제 등으로 제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했지만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웃 마을인 창산과 백동 마을은 마을 주민들 간 갈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이 마을은 한 사람의 피해자도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화목하게 지냈으며 가난하게 살아 서로의 분란이 없어 좌우의 대립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이 귀했다

 

▲ 매안마을 머구리섬
예전에 이 마을은 물이 없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주민들이 자조적으로 땅배추골이라고 부를 정도로 척박한 땅이어서 해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땅 배추는 특별한 관리가 없어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로 거름기가 없어도 잘 자란다. 또한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만 물을 주고 거름을 해주어야 상품성이 있는데 물이 없어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이다. 매안에서 매당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허천들이란 지명이 있다. 물이 귀했기 때문에 비가 오면 물을 쑥 빨아들였다는 들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적어 늘 줄을 서서 사용해야 했다. 해서 조금만 가뭄이 들면 십리나 떨어진 창산 마을 뒤까지 가서 양동이로 물을 길러 와 생활하였다. 한때는 마을 우물에 열쇠장치를 만들어 물 배급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지금은 지하수 개발이 잘 되어 풍족한 식수는 물론 많은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이 되었다.

예로부터 해제와 현경 망운의 황토는 널리 알려졌다. 입자가 고와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도자기를 만드는 연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른바 붉은 도자기[紅陶]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황토로 만든 도자기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마을의 황토는 널리 알려져 있어 도자기의 원료로 사용될 뿐 아니라 황토 벽돌을 만들기도 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마을에 작은 부뚜막 큰 부뚜막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는 목포 사람이 운영했던 벽돌 공장과 몽탄 사람이 운영했던 기와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예전에는 마을에 갑오징어가 많이 나왔다. 비가 많이 온 날이나 태풍이 불었던 다음날에는 어린 아이들도 갑오징어를 잡을 수가 있었다. 그때는 앞 바다 가득히 갑오징어가 널려 있어 누구나 잡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와 연륙이 되면서 물길이 막혀 지금은 갑오징어뿐 아니라 다른 수산물도 어획량이 많이 줄어들었다. 특히 이 마을의 감태와 낙지는 유명했다. 감태 철이 오면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만 해도 잘 익은 참외 맛이 나는 감태의 향이 진동했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의 감태를 갖고 광주나 목포에 가면 인근 주민들이 줄을 서서 사려고 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 머우섬 또는 머구리섬이라 부르는 蛙島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동백나무가 무성하여 주민들의 자랑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섬이 되었다. 원래 이 섬은 마을 공동 소유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관리 소홀로 언제부터인지 개인 소유로 변해 있었다. 머우섬 주변에 정챙이 개가 있다.

이 섬을 향해 길게 뻗은 사두라고 부르는 형국의 부리가 개구리를 잡으려고 하는 지세를 갖고 있다. 뱀혓바닥이라고도 부르는 이 지형에 예전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을 지어 거주하고 있다. 계곡이 실처럼 가늘게 뻗어나갔다 해서 실구렁이라 하는 지명과 큰골 적거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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