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城內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남으로 3㎞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동으로는 넓은 습지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어 대부분이 간척지이다. 남쪽은 신안군의 효지도와 압해도가 마주하고 있으며 남촌, 항장, 대박, 도원, 학례, 원성내, 농장 등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무안군 망운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다경진성이 있었다 하여 성안 또는 성내라 하였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이기촌 남촌 항장리와 현화면의 도원촌 대박산등 학례동을 합하여 다시 무안군 망운면에 편입 되었다. 이후 1983년 망운과 운남으로 분면되면서 성내리는 운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남촌에 계백군의 도산사와 신도비가 있으며 도원촌에는 부조묘가 있다. 또한 원성내에는 다경진성이 자리하고 있다.

박처럼 생긴 와우형의 마을

 

 

대박산은 성내3리에 속하는 마을로 운남면의 주산인 대박산 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은 영해촌과의 간척으로 형성된 농지가 펼쳐져 있고 옆에 바디나리 산이 있으며 도원촌으로 넘어가는 바위산이 있다. 지금은 곳곳이 개간 되어 농지로 활용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대박산 숲이 마을 뒤를 받치고 있었으며 아름드리 소나무가 마을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대로 마을의 지형이 바가지 모습을 하고 있어 와우형의 지세다. 바디나리는 성내리의 1번지가 시작되는 곳이며 옹달샘이 있다.

 

 

참고로 大朴山은 성내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혜운사가 자리하고 있다. 혜운사는 이 시대의 큰 스님인 청화스님이 토굴을 파고 용맹정진했던 자리에 들어선 사찰이다. 혜운사 입구의 일주문에는 朴山慧雲寺라 써 있다. 이러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사찰을 찾아 스님에게 왜 大朴山이 아닌 朴山으로 썼냐고 묻자 그 스님은‘이 사찰을 세우신 큰 스님(청화스님-입적하셨음)의 가르침대로만 표기했다’고 한다. 대박산은 망운과 운남면에서는 제일 높은 산(84.5M)이다. 주민들은 태박산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대박산이란 지명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대박산은 산경표에‘크고 밝은 뫼’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나주 다시에 있는 대박산은‘봉우리가 바가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 대박산의 의미는 아는 주민들이 없었다.

마을의 입향조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마을유래지에는‘마을의 형성은 밀양박씨 박양삼이 1660년경 함평에서 살다가 생활의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곳 대박에 정착하여 김해김씨의 딸을 맞아 자손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무안박씨, 김해김씨 제주양씨 들의 입향 유래가 밝혀지지 않아 대박 마을의 형성 시기는 자세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돼지농장이 많이 있어

하지만 밀양박씨의 족보를 보아도 박양삼은 찾을 수가 없었고 마을 주민이 말한 밀양박씨의 입향조는 훨씬 뒤의 사람이었다. 문헌을 통해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현화면 대박산리로 기록되었다. 이후 1912년엔 현화면 대박산동으로 1917년엔 망운면 대박산동으로 나온다. 1987년엔 운남면 성내리 대박산 마을로 나온다.

 

 

운해로에서 도원 마을을 지나 우회전하여 마을에 들어서면 돈분(豚糞) 냄새가 코를 찌른다. 3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 7군데의 돈사와 3군데의 우사가 있어 그곳에서 배출되는 냄새이다. 한 마을에 이렇게 많은 축사가 들어선 이유를 묻자 주민은‘마을 앞에 있었던 구일산업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70년대 구일산업이 이 마을과 영해촌을 막으면서 형성된 거대한 간척지에 농작물 대신 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구일산업이 문을 닫아 돼지 농장이 없지만 그때의 영향으로 마을에 돈사가 많이 생겼다는 말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닷가에 축사가 있으면 병충해에 강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해풍의 영향을 받아서 동물이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실지로 구제역이 전국에 요동칠 때도 무안에는 피해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해풍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옆 마을인 학례와 공동으로 실시한 행복마을 조성은 마을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았다. 비록 가축의 분뇨 냄새와 파리로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넉넉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을 주변의 황토 땅에 돈분이 들어가면서 땅이 기름져 농작물의 수확이 충실해져 소득도 많아졌다.

마을 주변의 땅들은 대부분 외지인의 소유다. 10여 년 전에 이 지역에 자동차 공장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아 투기바람이 불어 그때 대부분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에 외지인들이 싹쓸이 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유증도 많이 있다. 그때 묻지마 투자를 했던 서울 사람들이 투기 바람이 없어지고 잠잠해지면서 현장 확인을 하고는 망연자실해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봐야하는 주민들의 마음은 더욱 아프게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시에 운남과 운북의 갈등 속에서 이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마을회관 뒤 잔등을 장짓등이라 하고 장짓등 너머에는 대박 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의 둔덕을 동낭구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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