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松峴里는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면 쪽으로 3㎞ 가량 떨어져 있으며 좌우로 바다와 접해 있다. 이 지역은 소나무가 우거진 재[峙] 아래에 있다 하여 솔고개 또는 솔재라 하였는데 두모, 용동, 원송현, 성동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영광군 망운면 지역이었다. 이후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종리 성동리 두모리를 합하여 송현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두모에는 시도기념물인 곰솔이 있으며, 바다에서 민물이 솟아나는 약샘과 고인돌도 있다. 용동에는 꽃회사와 배나무정 지명이 있으며 원송현의 조금나루와 당산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소나무가 많은 고개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송현(松峴)은 원송현 마을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조금나루를 포함하여 송현3리에 해당한다. 망운면 소재지에서 운남쪽으로 3㎞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우회전하여 다시 2㎞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송현은 송림이 많은 고개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솔고개’또는‘솔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지금은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소나무를 많이 없애버려 마을 뒤는 민둥 고개가 되었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소나무는 과거에 울창했던 소나무 숲을 연상케 한다.

 

원송현 마을 전경

 

실지로 마을 앞 조금 나루에는 일제시대까지 성인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쌀 수 없는 크기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림자만 해도 200평이 넘는다는 나무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인들이 강제로 송진 채취를 하게 되면서 이 소나무도 그때 피해를 입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인근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의 등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으며 마을 이름을‘松峴’이라 하는 원인 제공을 하기도 하였다.
자료를 통해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송현이라는 지명은 없고 현재의 송현 마을로 추정되는 영광군 망운면 所落只라는 지명이 나온다. 소래기라고도 불렀다는 주민들의 말은 이곳의 지명이 소락지였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1912년의 자료에는 망운면 송현리로 기록되었다. 1917년과 1987년엔 망운면 송현리 송현으로 현재는 송현리 원송현으로 나온다.

당산제 축문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진관(자-선일. 1618-1703)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김해김씨 유허비를 보면 공은 충청도 서천에서 살았으나 세상이 혼란해 산림에 은거하고자 조용한 곳을 찾았다. 처음엔 운남면 취엽곡 범바위 주변에서 살았으나 건너다 보이는 이곳 지형이 길지임을 알아보았다. 하얀 모래가 십리에 걸쳐 펼쳐져 있고 경치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좌로는 소나무가 학처럼 펼쳐진 고개가 있고 우로는 선비가 앉아있는 형세여서 1657년 마을 이름을 松峴이라 이름 짓고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마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신창 맹씨 맹윤창(1655-?, 마을유래지에는 맹윤으로 나옴)은 17세기 후반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보여지며 이 마을에 오게 된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문랫등에 있는 세장비에 공은 엄격한 교육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며 충효의 가풍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금나루는 송학포구라고도 했다
마을 앞에는 조금나루라는 이름의 해수욕장이 있는데 예전의 명칭은 십리에 걸쳐 모래사장이 뻗어있다 해서 명사십리로 불렸다. 뿐만 아니라 松鶴浦라는 포구였으며 조선시대 이 지역의 세곡을 징수하여 영광목관에 운송하는 주요 창구이기도 하였다.‘조금’은 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음력 매달 초여드레와 스무사흘’을 이르는 말로 조금나루의 유래를 보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이 많이 빠지는 조금에도 배를 탈 수 있다는 나루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두 번째는 조금이 되면 칠산바다 등 인근 서해안에서 고기 잡는 배들이 이 나루로 들어와 어구를 손질한다든지 필요한 물품을 망운장에서 구입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 번째는 지형상의 이름이다. 조금 나루를 操劍나루라고도 하는데 이는 바다 건너 맞은편 운남면에 있는 범바위의 호랑이를 막기 위한 칼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나루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하얀 모래 위에 백년초 선인장과 해당화가 많이 있어 자랑거리였는데 유원지가 되면서 없어졌다. 이러한 모래톱이 형성된 이유는 마을 뒤 구랫골의 납싹(납짝)바위의 영향으로 조류에 변화를 주어 형성되었다 한다.
예전에 물이 빠지면 마을 앞에는 거대한 모래 운동장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모래 운동장을 장불이라고 불렀는데‘장불에서 놀고 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축구를 하기도 하였는데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마을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 바닷모래를 건축자재로 이용하게 되어 모래가 점차 사라지면서 이제는 뻘밭이 되었다.
이 마을의 특징으로는 장수노인이 많다. 80세 이상의 노인이 20여명이나 넘으며 노인들이 아직도 뻘밭에서 낙지를 잡는다거나 굴을 까는 등 바닷일을 할  뿐 아니라 농사일을 건강하게 하고 있다. 실지로 2005년 처음 마을 탐방을 할 때 마을에 전해져 내려는 들노래를 불렀던 당시 91살의 맹용호 옹은 금년 97세의 나이로 별세 하셨다고 한다.

▲장수 마을이다
이렇게 장수할 수 있는 요인으로 마을 사람들은 기름진 땅과 맑은 물 그리고 건강한 해풍과 마을 앞 뻘에서 잡히는 해산물을 이유로 꼽았다. 이 마을에서 잡히는 낙지, 숭어, 석화 등은 맛이 좋기로 무안에서 제일이며 전국에서도 그 맛이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게르마늄 성분이 풍부한 황토가 비가 오면 씻겨 내려가 뻘과 만나서 형성된 천연의 조건이 이곳만의 독특한 맛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원송현마을 당산석

 

이 마을 뒤에는 송현 당산이라 부르는 300여평의 팽나무 단지가 있다. 이곳에서 매년 당산제를 지내는데 이 당산제는 입향조가 마을에 정착할 때 심었던 팽나무가 신목(神木)이 되어 그 나무 아래서 지낸다. 원래는 정월 1일에 지냈는데 현재는 정월 보름 낮 12시에 지낸다. 제의 신격은 당산 하네와 당산 할멈으로 풍어와 풍농 그리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
마을 뒤에 김해김씨 효자각이 있으며 남아있는 지명으로 진장볼 당산 중부재 중반골 재사등 산막금 봉사물 장질 샘건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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