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淸川里를 말하는‘맑으내’는 淸川을 한글로 풀어 쓴 마을 이름이다. 맑은 물이 산골짜기에서 쉬지 않고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청천 일부와 외읍면의 대동리 일부를 합하여 청천리라 해서 청계면에 편입됐다.

상청천과 하청천으로 이루어졌으며 국도1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또한 두 마을 사이에는 나분돌들이 펼쳐져 있다. 상청천은 달성배씨, 하청천은 무안박씨의 집성촌이다. 상청천의 달성배씨 사당인 청천사는 동학농민 혁명 때 집강소가 있었던 곳이며 제각인 청천재가 있다. 또한 배병의 배규한의 효자각이 있다. 하청천에는 무안박씨 제각인 영락재가 있다. 또한 군 보호수인 개서어나무와 팽나무, 배롱나무 그리고 11기의 고인돌이 있다.

▲ 상청천마을 전경

▲달성배씨의 집성촌

상청천은 청천1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 이씨와 박씨가 살았다. 15세기 중반에 배씨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은 점차 다른 마을로 이주해갔지만 아직도 마을 주변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는 달성 배씨의 집성촌이다. 달성배씨 입향조인 증암 배 회 공이 경상도 대구에서 살다가 세조 때 충신들의 거사인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1456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곳을 찾아 이곳 맑으내로 들어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친 곳이다.

마을 앞에는 국도 1호선을 따라 열을 지어 나무들이 서 있는데 팽나무, 개서어나무, 느티나무가 있다. 대부분 500여년이 넘은 오래된 나무들인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배회 공이 마을의 땅 기운은 흡족한데 서해 창포에서 불어오는 해풍 때문에 가옥은 물론 농작물이 많은 피해를 입고 있어 고민하다 마침 지나가는 나그네의 말을 듣게 되어 심게 된 나무들이라고 한다.

이 나무들을 심은 후부터는 건해풍(乾亥風-서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막을 수 있어 자손이 번창 해지고 마을도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에는 이른바 무안에서는 제일의 명당이라는 금구도니형(金龜渡泥形-금거북이가 뻘 밭을 넘어오는 형국)의 무덤 자리에 입향조인 배회공 할머니를 모셔 후손들이 발복하는 좋은 일을 가져왔다고도 한다.  

▲ 청천사
마을에는 청천사와 청천재가 있다. 청천사는 1812년 달성배씨의 명조(名祖)들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나 1868년 훼철되었고 이어 1872년에 다시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마을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동학의 집강소가 남아있다. 이른바 청천재 집강소다. 이 마을은 1894년 농민들의 변혁운동인 무안 동학의 중심지였다. 배상옥 장군을 중심으로 뭉쳐진 무안의 동학군들은 이 마을 달성배씨 사당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이 중심이 되는 대동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배상옥 장군은 당시 청계 접주인 배정기의 잠실(청천재 옆에 있었다)에서 기거 하면서 동학군들을 지휘했다. 

▲淸川은 세 개의 골짜기에서 비롯

청천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샘 井자가 들어있는 세 개의 지명에서 비롯된다. 마을을 가르고 흐르는 맑은물의 원류인 빈대정골과 점지정골 그리고 왜가리정골인데 이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들이 전부 마을 앞으로 지나고 있다. 이처럼 淸川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의 변화를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천동으로 나온다. 이후 호구총수에는 이서면 청천리로, 1912년엔 이서면 상청천리로 1917년 이후엔 청계면 상청천으로 나온다.

이 마을에서 두 개의 정려가 나왔다. 하나는 고절리에 있는 여산송씨정려다. 여산송씨는 임진왜란 당시 무안박씨 박제 장군의 부인으로서 왜군에게 희롱을 당했다 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열녀였다. 후일 왕조에서 그의 절개가 가상하다 해서 정려를 내린 것인데 원래 그 정려각이 이 마을에 있었다. 지금도 정문거리라는 지명과 정려를 위한 위토답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주민들은 어느 때 정려가 고절리로 옮긴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한다. 또 하나는 함평에 있는 이 마을 출신의 달성배씨정려다.

마을 앞길은 한양 가는 길이었다. 또한 창포포구가 주변에 있어 늘 사람들로 붐볐고 일제강점기 때까지 장승거리 옆에는 객사가 있었다. 장승거리는 마을입구에서 100여 미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개의 선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약 20미터 의 거리를 두고 서있는 선돌은 길이가 각각 2미터 40, 1미터 50의 길이다. 장승 옆에는 천연기념물이라는 시멘트 표지석이 희미하게 서있다. 원래 마을 입구는 현재의 길이 아니라 이 장승거리였다.

마을에서 몽탄으로 넘어가는 길을 좁은골재라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몽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할 때 서호리 남안리 무안읍 일부 등 지역 사람들이 기차역을 가기 위해 자주 드나들었던 재이다.

▲ 상청천마을 장승거리
마을 뒤에는 폭포수가 떨어질 때 맑은 옥구슬 소리를 낸다는 명옥폭포(鳴玉瀑布-삼바실폭포라고도 한다)가 있다. 한때 이 폭포는 불치병 환자에게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전국에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앉은뱅이였던 환자는 이 폭포수를 맞고 걸어 나오기도 하였으며 피부병에 걸린 환자는 단 한 번의 물맞이로 10년의 고질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정한 사람이 이 폭포수를 맞으면 오히려 화를 입어 멀쩡한 사람도 변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폭포 옆에는 동굴이 있는데 굴에 돌을 던지면 그 돌이 일로의 주롱나루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몽탄강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영산강과 연결된 깊은 굴이다.

이러한 폭포와 굴을 옆에 놓고 자리한 절이 麻谷寺다. 이 사찰은 배종무 전국회의원의 어머니가 세운 절로 기록에는 1954년에 세웠다고 하나 주지 스님의 이야기와는 달라 확실한 창건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마을 앞에는 이 곳이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마을임을 보여주는 두 개의 효자각이 있다. 배규한 효자각과 배병의 효자각이다.

고인돌이 11기나 있다. 마을 앞에 2기와 4기 그리고 냉동창고 뒤에 5기가 있다. 그중 큰 것은 길이 410cm 너비가 330cm나 될 정도로 크다. 주민들은 예전에는 많이 있었으나 길을 내거나 밭을 경작하면서 많이 묻거나 깨버렸다고 한다.

※마을탐방‘맑으내 마을’은 백창석 무안향토문화연구소장이 본지 제69호(2005년 2월 26일자 9면)에 탐방 게재했던 마을이지만 이번에 재탐방 했다. 백창석 무안향토사연구소장은“앞으로도 이미 탐방했던 마을 중에서도 부족하다 싶으면 재탐방하여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무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