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唐湖里는 몽탄면 소재지에서 일로로 가는 81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6㎞ 지점에서 영산강 쪽으로 가면 만나는 마을이다. 영산강 간척사업으로 마을 주변에 널따란 농지가 형성되어 있어 풍요로움과 광활함을 준다. 호구총수를 보면 박곡면 唐湖里와 葛山里 新興洞으로,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서도 박곡면 唐湖洞과 葛山里 新興洞으로 나온다. 지명의 유래는 연못이 많이 있어 唐湖라 하기도 하고 마을을 이룬 선조가 당나라에서 건너 온 것과 주변에 호수가 있어서 唐湖라 했다는 설이 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로읍 복룡촌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시켰다. 원당호 갈산 신흥동으로 이루어졌다.

▲ 몽탄면 당호리 신흥동마을 전경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

신흥동은 당호3리에 속하는 마을로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나주임씨 임 위가 새롭게 일어나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林 瑋(자-平仲, 호-東里. 1597-1668)는 柳湖 林 의 둘째 아들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성품이 침잠순후하고 효도와 우애에 돈독하였다. 학문이 높았음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늘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만년에 마을에 취련당을 짓고 기거하면서 형인 목사공 몽촌이 있는 일로읍 회산의 관해정에 오고가며 정을 나누었다. 자료에는 ‘신흥동과 회산은 牛鳴地(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위가 지었던 취련당은 6칸의 팔작지붕의 저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당호도 없어지고 사랑채가 뜯겼으며 몸채를 현대식으로 개축하는 등 형태가 많이 변하였다. 하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과거 양반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사랑채는 그 구조와 배치가 독특하다. 공은 취련당에 관련된 시[題醉蓮堂]를 남기기도 하였다.

나주임씨가 물러나고 이후에 들어온 사람이 밀양박씨 박연우(자-원택, 호-매산. 1883-1943)이다. 공은 이웃 마을 일로읍 복룡리 사교 마을에서 이주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마을일을 보면서 다수확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선산임씨 임학규씨가 들어왔는데 족보를 통해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현재 나주임씨는 한 가구도 없고 밀양박씨와 선산임씨 등이 살고 있다. 해서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밀양박씨로 볼 수 있다.

▲가난했지만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 나주 임씨 종가
지명의 변화를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무안현 박곡면 신흥동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도 박곡면 당호리 신흥동리로 표기되었으며 1987년의 자료에도 몽탄면 당호리 신흥동으로 나온다. 

마을은 개꿀재(개굴재 - 일로읍 복룡리 사교마을에서는 元驪峰이라 부르고 있다)를 주산으로 하고 앞으로는 영산강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 맥을 갖추고 있어 전형적인 와우형의 구조다. 마을 주변의 산림이 개발이 되기 전에는 배산임수의 아늑한 풍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하지만 농민들에게는 경작할 땅이 없어 매우 힘든 지역이기도 했다. 낮에는 강에서 맛과 게를 잡고 저녁에는 가마니를 짜 어렵게 생활을 해온 것이다. 마을 풍경만 보고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도 10년을 넘어서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주변 환경이 열악하였다. 그러다 1980년대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80년대 중반부터 소[牛] 등 축산을 하게 돼 부농을 일구기도 하였다. 지금은 농사 외에도 부추 농사를 하여 상당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 옆에 있는 당호저수지는 소화7년(1932년)에 1차 완공하고 광복 이후 증축하였다. 이 저수지는 일로읍에 조성되어있는 영화농장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마을 앞으로 수로가 지나가지만 주민들은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해서 저수지 밑에 농지가 있었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논농사를 짓지 못하고 밭농사를 지어야 했다.

일본인들이 처음 저수지를 축조할 때 땅을 파는데 해골이 많이 나왔다. 이 해골을 공사 감독자가 보고 안 묻어 주고 발로 차버려 그 감독자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몽탄에서 목포로 가는 기찻길에는 두 개의 재가 있었다. 이 마을 뒤의 개꿀재와 삼향읍 용포리의 무너미재다. 이들에게는 일제강점기 때 철도를 놓는 과정에서 일어난 각각의 사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개꿀재는 철도공사를 하는데 주변의 지형으로 보아 바위가 없는 흙만 있는 것으로 알고 공사를 했는데 파고 보니 바위 투성이었다. 바위를 파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굴은 내지 못하고 주변을 파 협곡을 만들어 철로를 놓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진짜 굴이 있는 재가 아니라 거짓굴의 재라 해서 개꿀재라 했다. 무너미재도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지역은 오룡산의 맥을 이었기 때문에 바위 투성인 줄 알고 공사를 했다. 그러나 굴을 파는 과정에서 바위는 나오지 않고 흙만 나와 자주 무너지자 굴을 뚫지 않고 협곡으로 만들면서 무너미재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마을은 주민들이 서로 단합하고 협동심이 강해 아직까지 큰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 마을이지만 예부터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나주 임씨가 있을 때는 9명의 진사가 나온 곳이라는 말을 들었을 뿐 아니라 보해양조 창업주인 임광행씨의 텃자리이기도 하다. 또한 밀앙박씨 가문에서 1명, 선산임씨 가문에서 3명의 고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당호저수지 옆의 여시재, 마을 앞의 도롱골, 그외 맥차골 산꼬지 텅텅머리 등이 남아있다. 앞샘과 모퉁아리 샘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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