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龍浦里는 삼향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일로의 당항촌과 용포리를 잇는 간척사업으로 마을 앞엔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그 사이로 흐르고 있는 남창천이 일로와 경계를 이룬다. 811번 지방도로와 호남선 철도가 지나고 있다.  

본래 나주군 삼향면의 지역으로서 오룡산 밑에 포구가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고 1910년에는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정리, 용계리, 평전리, 덕치리, 추치리, 신동리, 와동리와 장항리 극배동, 이동, 용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포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후정, 용계, 용포, 덕치, 이동, 계두, 와동 등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장항포 간척지 이후 형성된 마을
후정은 용포1리에 속하는 마을로 오룡산의 맥을 이어받은 網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망산은 가뭄 때 기우제를 지냈던 산이었으며 주민들의 야유회 장소이기도 했다. 마을 앞으로는 장항포 들이 있고 그 너머로 일로 당월촌 호암산의 범바위가 마주하고 있다. 주민들은 일로의 호랑이가 노루목의 노루를 잡아먹으려고 달려오는데 망산의 그물을 보고 멈춰 있다고 보고 있다. 마을은 큰 마을 후정과 작은 마을 노루목으로 이루어졌다.

문헌으로 마을 이름의 변천을 보면 1789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 무안군 삼향면 后丁리로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엔 삼향면 용포리 后丁 그리고 1987년의 자료에는 삼향면 용포리 後汀으로 나온다. 하지만 주민들은 무안군 삼향면 용포1리 后亭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마을 유래지에서는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마을에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왕과 왕후가 지나가다 이 나무 아래서 쉬어갔다 하여‘후정’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입향조인 김해김씨가 분가하여 빛을 발한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오룡산 뒤쪽의 마을이란 의미가 아니면 장항포를 막은 이후에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장항포 뒷마을이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처음 마을에 들어온 성씨는 옆 마을인 안동에서 건너 온 김해김씨이다. 이후 제주양씨 금령김씨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김해김씨 입향조를 확인하려 했으나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제주양씨 입향조는 양우영(자-봉규, 호-일암. 1842- ?)이다. 양씨들은 장항포 간척지가 조성될 무렵에 일로 등림 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역사의 마을에 많은 인물이 배출돼
마을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정부와 기관의 부당한 시책에 맞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했던 두 번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하나는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서해안 고속도로의 연장선인 L자형 도로공사 노선에서다. 이 도로는 처음엔 일로와 삼향의 경계 지점인 남창천을 기점으로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같은 마을인 노루목이 걸려서 주민들이 변경을 요청했는데 현재의 길로 설계가 된 것이다. 주민들은 고속도로가 마을의 전망을 막게 된다는 점을 들어 오랫동안 농성을 하면서 설계변경을 다시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리상 현재의 길이 아니면 마을 뒤로 길이 나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1960년대 중반에 장항포 들에 비행장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토지가 좁았던 용포리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주민들의 싸움이 승리하여 비행장은 목포시 용당동으로 옮겨갔다.
작은 마을인 노루목 마을에는 큰 남산과 작은 남산이 있다. 노루목은 포구로서 예전에는 주막도 있었다. 남악리의 토지들이 그렇듯이 이 마을도 남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토지들이 김장성(김성규)의 소유로 되어있다

 

 김철진 영덕비

큰 남산 아래에는 지금도 김성규의 아들인 도회의원 법학사 김철진영덕비가 있다. 이 비는 1941년 보은사 소작인이 세운 것으로 남악리 회룡 마을 앞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노루목 마을 앞에는 장항포 간척지에 물을 대는 삼향배수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엔 큰 장항포와 작은 장항포가 있다. 조선 왕조 대에 노루목은 나주에 속하였고 자방포는 무안에 속한 적도 있었다. 노루목과 범바위 사이를 일제초기 1900년대 초에 막은 500m정도의 제방으로 인하여 장항포들이 만들어 졌다. 제방의 반대쪽을‘자방포’라고 하나 큰 장항포가 와전된 것이다.

작은 장항포인 노루목 선창의 위치는 현재 삼향배수장의 하단에 해당한다. 70년대까지 중선배들이 들어 왔으며 인근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마을에 팔았던 어촌이었다.

이 마을이 역사는 짧지만 작은 마을에서 박사 판사 군수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척박한 환경인데도 뛰어난 인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예전에 주민들은 가마니를 짜거나 바다에서 잡은 수산물들을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목포까지 걸어가 팔아서 자녀들 학비에 사용했다.  

한국전쟁 때는 마을길이 인민군들의 이동로가 되기도 했다. 마을에서 조금만 가면 생기미 나루가 있는데 그 나루는 당시에 영암으로 건너가는 큰 나루였기 때문이다. 당시 주민들은 이러한 교통의 요충로였기 때문에 주민들이 조를 짜서 순찰을 돌기도 하였다. 인민군들이 마을에 주둔했는데도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다. 

마을 뒤에 두 아름이 넘는 구수나무 당목이 있었다. 이때는 주민들이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고 농악놀이도 하였으나 나무가 죽은 이후부터는 당산제가 없어졌다. 마을은 지리적인 영향으로 겨울에는 북풍을 그대로 받아 춥고 눈도 제일 늦게 녹았으며 여름에는 시원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용계마을과 경계 골짜기인 성적골(서적골이라고도 한다) 샘고랑 섶들이(배를 매었던 곳) 소당골 중성골 가잿등(용계에서 들어오는 마을 입구, 예전에 주막이 있었다) 진주 갯들건너 지샛논 중촌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이 마을에서 1987년에 오룡산 일주도로 개막식을 했으며 당시의 표지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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