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 ‘스토리’가 관광자원이다

본지는 무안지역 ‘스토리텔링’ 발굴 일환으로 지역의 전설 및 마을 유래담을 연재합니다.(마을탐방은 무안향토사연구소 백창석 소장의 현장 탐방 기고로 이루어집니다) -편집자주-

해제면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매리는 매곡, 토치, 외분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구여동, 외분매, 금성동, 가양리, 토치리 매곡 등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외분매와 매곡의 두 마을에 梅자가 모두 들어있다 해서 兩梅里라 부르게 되었다. 봉대산의 맥을 이은 상감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고 매곡에 모충사와 광산김씨 삼강비 그리고 충열문 등이 있으며 외분은 금성사와 감동샘 등이 있다.

▲ 매곡마을 전경

▲충절이 스며있는 광산김씨의 마을

매곡 마을은 양매1리에 속하는 마을로 광산김씨의 동족 마을이다. 봉대산의 맥을 이은 매봉재를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속등과 안산을 좌우로 하여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배산 임수의 길지로 와우형의 자리였다. 마을의 주산인 매봉재는 양매리의 1번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1번지는 모충사이다.

이 마을은 특이하게도 한 구역에 두 마을이 붙어있다. 보통 자연 마을의 구분이 지형적 특성을 경계로 되어 있는데 반해 이 마을은 한 지형 안에 문중의 사는 거주지에 따라 구분이 되고 있다. 즉 광산김씨가 사는 지역과 파평윤씨가 사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하면서 매곡과 외분 마을로 구분된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고려조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었던 직제학공 김약시의 후손인 광산 김씨 金億昌(자-자정, 1585-1646)이다.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모두 이끌고 배를 이용하여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바다에서 심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어 정착한 곳이 당시 함평현에 속했던 이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처음 이름은 佛舞洞이었다. 입향조가 들어 와 바라보니 불갑산이 아스라이 보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후 마을의 지형을 본 따 盆梅洞이라 하였다. 분매는 마을이 와우 형국에 매화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새터에 파평윤씨 윤득열(1574-1642)이 들어오고 뒷골에 윤형은(1647-1707)이 들어오면서 외분매와 내분매로 나뉘어졌다.

梅谷의 지명 유래는 매곡사당과 함께 한다. 입향조의 아들인 金得男(자-선술, 호-매죽헌, 1601-1637)에게 1832년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리자 문중에서는 매곡사당과 충열문을 세웠다. 그리고 마을 이름도 파평윤씨와 함께 살고 있는 외분매와 분리해 매곡이라 이름 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모충사 주변에 커다란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고 하나 모두 枯死하고 현재는 매곡강당 앞에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전형적인 선비 마을

▲ 매곡강당의 책상
문헌을 통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매곡은 나오지 않고 외분매동, 내분매동만 나온다. 1912년에 발간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야 가양동, 금성동, 반곡리, 매곡동, 외분매동, 내분매동 등이 나오며 1917년에는 해제면 양매리 구여동 외분매 금성동 가양리 매곡동 토치리로 나온다. 1987년에는 해제면 양매리 매곡 외분 토치 마을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충절의 역사가 있는 가문의 마을답게 모충사, 칠효열각, 삼강비, 충열문 등 마을 단위로는 드물게 많은 여러 유적들이 있다. 또한 지역과 나라 발전에 공헌한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유공자이며 항일의병장이었던 김익수가 있다. 김익수(자-문옥, 호-절당, 1880-1920)는 면암 최익현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김구선생과 교유하며 활발히 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에게 두 차례나 잡혔으나 모두 탈출하였다.

이른바 해제 4선생 중의 한분인 잠와 김용수(1865-1940)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경술국치 때는 단을 쌓고 통곡을 하며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 또한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해제초등학교 설립시에는 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잠와 유고집이 남아있다.

마을은 전형적인 선비 마을이다. 광산김씨 동족마을로서 많은 벼슬아치들을 배출하여 주변에서 양반마을로 인정을 받았다. 해서 해제면의 다른 지역에 살면서도 외지에서 어디에 사냐고 물어보면 매곡에서 산다고 할 정도로 주변에서 인정받았던 마을이다. 이러한 기풍 때문인지 이 마을을 기점으로 1㎞ 안에는 세 개의 사당이 있다. 외분의 금성사 내분의 분매사 그리고 매곡의 모충사이다. 

상감산 아래 광산김씨 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까지 갖췄다. 여기에 쓰인 재목은 매곡마을에 있었던 모충사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와해될 때 그대로 가져와 개축한 것이다. 상감산은 양매리의 주산이면서 광산김씨 문중산이다. 이곳에 입향조를 비롯한 문중 어른들의 묘가 모셔져 있다. 산 입구에는 충의공 매죽헌 김선생 신도비가 있다.

여기에 특기할만한 묘가 있다. 이른바‘충노박복지묘’가 그것인데 묘지 입구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매죽헌공이 철곶(현재 양화대교)첨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화도 싸움에서 청군과 교전 중 전사하자 시신을 끝까지 지켰다. 또한 박복은 이런 사실을 고향에 알리고 시신을 운구하여 매곡마을까지 왔다. 이후 끝까지 매곡에 살면서 광산김문에 충성을 다 해 문중에서 그의 충정을 기려 묘도 쓰고 비도 세운 것이다.

▲솔대거리가 있다

봉대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개니라는 지명이 있다. 개니는 개리(開里)에서 비롯된 말로 마을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후일 주민들은 마을이 깨끗하고 주민들이 어질다 하여 가양이라 했다. 마을에서 가양으로 가는 잔등에 일제강점기 시절 견직공장이 있었다. 견직공장은 나중에 간립학교로 변하기도 했다.

회관 앞을 솔대거리라 했다. 입향조 이후 문중의 여러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서 내분 마을로 넘어가는 길을 개동채라 했으며 이 마을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잔등을 속등이라 했다. 이 등에서는 정월 보름이면 내분 사람들과 불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마을 중앙에는 매화낙지샘이라 부르는 우물이 있다. 다른 마을처럼 여러 개의 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만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고 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현재는 고사되어 없고 새로 심은 한 그루만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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