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바의 뿌리를 찾아서-2 <김대호 성화대학 겸임교수>

주)무안신문사에서는 지난 4회에 걸쳐 연재한‘일로품바의 역사적 고찰과 자원화’에 대한 특집을 연재했다.

이어 앞으로 2회에 걸쳐 일로품바의 뿌리로 추정되고 있는 인도의 사당패 밀교아쉬람과 인도의 품바 바울(baul)에 대한 현지 보고서를 게재한다.

본 원고는 성화대학 김대호 교수가 지난 2009년 겨울부터 2010년 봄까지 인도 웨스트벵갈주에서 3개월 간 직접 취재 한 내용으로 오마이뉴스에 발표된 것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편집자주>

▲ 성자 ‘샤돈바바’의 법회를 보기위해 몰려 든 군중들

▲깨달음의 숲속학교 아쉬람에는 교실이 없다

나는 청년기를 보내며 불혹을 맞이하는 이들에게‘중간 정리’차원에서 한번 인도를 다녀오라고 권한다. 두 번 갈 곳은 아니라는 충고도 곁들인다. 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오더라도 항상 못 잊어 하면서 도피처로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다. 그만큼 인도는 중독성 강한 몽환 속에 있다.

인도인들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뇌할 때 길을 일러주는‘깨달은 어른(성자)’들과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아쉬람이 어디에나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목사님, 신부님, 스님 같은 분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그분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엄숙하고 멀리 있으며 완벽하다. 인도의 성자들은 아이 같고 천진난만하여 가깝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쉬람은 우리의 선원이나 기도원, 수도원 같은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요즘은 많이 상업화돼 외국인을 위한 요가나 명상센터쯤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원래는 숲속에 초막을 짓고 사는 수행자들의 공동체이자 숲속학교였다. 교실이나 교과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드리 나무그늘에 앉아 스승은 제자에게 은밀하게 구수한 옛날이야기 하듯 가르침을 전해 준다.

요가철학이나 명상을 통한 수행방법 외에도 바울들처럼 음악과 시(詩)라는 형식을 통하는 경우도 있고 극한의 고행을 통해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나 홀로 아쉬람부터 시작해 수 만 명이 머무는 국제적 요가와 명상센터까지 인도 전역에 수 십 만 개가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대 인도인들은 인생을 4단계로 살았다고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숲속학교(아쉬람)의 구루(스승)에게 보내 우파니샤드 철학을 비롯한 명상과 요가 등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지혜를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구루를 떠나 사회로 돌아와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세속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마치고는 다시 숲으로 들어와 수행을 한다. 마지막엔 속세를 벗어난 완전한 출가자로서 수행과 탁발로 생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바울들의 공동체 샤돈바바 밀교아쉬람

가장 높은 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겸손에 의해/ 당신은 삶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나니./ 구름은 이 땅의 빈 곳까지 내려오지만/ 우물 속 깊은 밑바닥은/ 환희로 물을 지켜준다.
바울들의 성자로 추앙받는 샤돈바바의 아쉬람에서 1주일을 머물렀다. 사람들은 이곳의 구루인 샤돈바바를‘바바지’라고 불렀다. 바바지는 세속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자로 최고의 영적 지혜를 가진 현자(賢者)를 일컫는 말이다.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적 고리의 역할을 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카르마(업)를 깨닫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존재다.

샤돈바바의 아쉬람은 잠시 머무르는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대략 30여 명의 바울들이 거주하는 작은 공동체였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도식‘스머프마을’이었다. 파파 스머프처럼 덥수룩하고 인자한 수염을 기른 샤돈바바는 구루로써 아쉬람을 이끌었다. 그 나머지는 사두(남자 수행자)와 사디카(여자 수행자)들로 구성된다. 나는 여기에서 조선중기 우리의 사당공동체의 삶의 방식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쉬람에서는 특이하게 아이를 공동 양육했다. 물론 낳은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부모를 포함해 모든 수행자들을 사두와 사디카로 부르며 그들의 가르침의 젖을 받아먹었다.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과 놀아주고 가르치고 양육한다. 아이들은 나무와 꽃들과 바람과 별들과 새들을 벗삼아 놀다 지치면 아무나 제 맘에 드는 어른의 어깨에 올라 재롱을 피웠다.

생필품을 제외하고는 사적소유가 인정되지 않았으며 집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공동소유였다. 같이 농사를 짓기도 하고 음악을 통한 탁발공연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큰 공연이 있을 때는 가까운 곳은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탔고 먼 곳은 트럭을 이용했다.

아침에 잠이 깨면 누구나 일을 했다. 어떤 이들은 밥을 짓고 또 어떤 이들은 아쉬람 곳곳을 청소하고, 정원을 가꾸기도 했다. 밖에 나가 시장을 봐오거나 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역할에 따라 요리사 스머프, 청소부 스머프, 정원사 스머프, 농부 스머프, 세탁소 스머프로 불렀다. 그들도 그 별명을 아주 좋아했다. 특별한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이들은‘게으름이 스머프’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능력과 재능에 따라 하는 일이 달랐고 그것이 부끄러움이나 차별의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아쉬람에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식사문제였다. 요리를 무슨 경건한 수행처럼 했다. 분명 아침 일찍부터 시작은 하는데 무려 2∼3시간이나 걸렸다. 5분 만에 배달되는 자장면에 익숙한‘배달민족’에게는 화통 터질 일이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만 요리하는 인도의 조리문화 탓도 있지만 야채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약한 화덕 불에 몇 시간씩 볶는 그 정성은 특유의 향신료 냄새까지 더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게 했다.(덕분에 몇 년을 괴롭히던 위궤양은 말끔히 낳아 버렸다.) 자꾸 주방을 서성거리는 나를 보았는지 요리사 스머프는 씩 웃으며 다음날부터 내게 슬쩍 샌드위치를 쥐어 주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쉬람을 찾는 방문객들이 스위티(SWEETY)와 생과자 같은 것들을 시주하기도 했는데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요리사 스머프가 사람 수대로 똑같이 나눠 주었다. 우리는 모두 회랑이나 나무 밑에서 바나나 잎이나 나뭇잎을 말려 만든 그릇에 밥을 먹었다. 남는 음식 찌꺼기는 개가 먹었고 그릇들은 염소가 해치웠다. 거기다 완벽한 채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음식물쓰레기에 대한 고민이나 따로 설거지가 필요 없는 완벽한 생태적 식생활이었다.

샤돈바바라고 해서 궁궐 같은 화려한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똑같이 흙벽돌로 지은 집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잤다.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샤돈바바는 장난꾸러기다. 엄숙하거나 경건하지도 않았고 지극히 느슨하고 경쾌하고 발랄 했다. 기괴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놀리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춤을 덩실거리기도 했다. 우리에게 장난을 걸거나 농을 치기도 했다.‘애 같은 어른’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이들에게는‘가르치는 것보다 놀아주는 것이 가장 큰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같이 장난치며 노는 샤돈바바를 바라보는 수행자들의 눈빛에는 늘 존경심이 배어 있었다.

아쉬람에서는 일반 부부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과 짝을 지어 살고 자녀도 낳았지만 그 부부관계는 일종의‘도반(깨달음의 길을 같이 가는 사람)’의 관계여서 서로를 사두와 사디카로 부르며 존중하고 존경했다. 스머패트를 대하는 스머프들처럼 요리나 청소 같은 일들은 주로 남자 사두들의 일이었다. 성별이나 역할에 따른 구별과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수행자는 누구나 평등하게 대우 받았다.

저녁 8시. 수행의 시간이 되면 모두 회랑이 모였다. 엄격한 규율이나 철학을 가르치는 딱딱한 자리일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모두 엑따라와 아논도, 꼴로딸, 로호리, 도따라와 같은 악기를 하나씩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샤돈바바가 자신의 깨달음을 즉흥적인 시(詩)로 만들어 노래를 부르고 수행자들은 후렴으로 받았다. 이것이 일종의 설교이자 선문답인 셈이다. 간혹 제자들이 자신들의 깨달음의 시를 스승에게 노래로 불러 보이기도 했다. 이때만큼은 샤돈바바도 달라 보였다. 진지모드였다.

사랑의 느낌을 알지 못하는 자와/ 무슨 교감을 나누겠는가?/ 부엉이는 우두커니 앉아/ 하늘을 응시하지만/ 태양빛을 보지 못하나니.
<바울의 노래중에서>

가장 높은 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오직 겸손에 의해/ 당신은 삶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나니./ 구름은 이 땅의 빈 곳까지 내려오지만/ 우물 속 깊은 밑바닥은/ 환희로 물을 지켜준다.
<바울의 노래중에서>

경건하고 차분하게 시작된 노래는 시간을 더해 갈수록 열광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샤돈바바의 며느리가 환희에 차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일어나 발작하듯 춤을 춘다. 음악도 빨라지고 격해진다. 춤을 추다 혼절해 쓰러진다. 남편이 가만히 안아다 무릎을 베어준다. 잠시 후 깨어난 그녀는 엎드려 수행자들의 발등에 일일이 입을 맞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연이어‘감사하다’를 연발한다. 일부는 구루의 아름다운 시와 심오한 철학의 깊이에 감동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열광적인 부흥성회를 보는 듯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의 입에서는 방언 대신 시가 쏟아진다는 점이다. 나도 어우러져 춤을 추었다.

인도밀교의 방식은 다양하다.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토템까지 다양한 방식과 내용으로 존재하며 심지어 유일신을 섬기는 무슬림들도 포키라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과거 정치권력은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종교와 손을 잡고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을 위해 정통과 이단에 즉 피아에 대한 구분 짓기에 들어간다. 권력유지에 걸림돌이 되거나 지배 권력의 정치사상에 배치되는 이들은 이단으로 규정되고 무자비한 탄압이 진행된다. 우리 역사에서도 태종과 세조, 성종에 의해 차례로 제거되는 개국공신들과 훈구파들, 임진왜란 후 선조에 의해 제거되는 의병장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인도밀교들 또한 오래전부터 그 철학과 수행의 방식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처 왔다. 권력자들을 피해 은밀한 곳에 아쉬람을 짓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은밀하게 계승하면서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권력과 세계를 움켜쥐었지만 결국 또 다른 권력에 의해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인도불교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바울이 아니기 때문에 샤돈바바에게 수행의 방식은 묻지 않았다.

▲사당패는 연예인가? 철학자인가?

▲ 멜라(축제)공연(탁발)을 위해 달구지를 타고이동하는 바울들
슈미트(J. Marc Schmidt)라는 호주출신 사회학자는‘개구쟁이 스머프에 나타난 사회-정치학적인 논제’라는 글에서 스머프 마을은 자급자족하며 토지는 개인의 소유가 아닌 전체 스머프들의 공동소유라는 점에서‘그 자체가 사회주의자(마르크스주의자)들이 꿈꾼 공동생활체, 혹은 코뮌(commune)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이 유토 피아를 처음 탄생시킨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국가론’에서‘이상 국가를 위해서 통치자와 수호자집단의 사유재산은 금지돼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탐욕의 원인이 사유재산과 사적 인간관계에서 기초한다고 파악했으므로 아내의 공동소유와 아이들의 공동양육도 주장했다.

원시 부족사회는 대부분 그러했고 초기 유대교는 공산주의 공동체로 운영되었으며 기독교 초대교회 또한 사적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공동체생활을 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를 탄생시키기는 했지만 니체는‘철인’에 의한 공산주의적 이상국가 실현을 위해‘신의 죽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오웬이나 생시몽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의 농민공동체,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유럽의 생태공동체, 종교공동체까지 유토피아를 찾는 인간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의 사당공동체가 꿈꾸었던 이상향은 무엇이었을까?

유학자들의 주장처럼 백성들을 선동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혹세무민으로 신라와 고려의 찬란했던 불교권력을 되찾고자 했던 것일까?

불교를 억압하고 백성을 수탈하는 조선봉건에 저항했던 조선불교의 비밀결사체로서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숭유억불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찰에서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생존방식이었을까?

유학자들에 의해 사당패, 걸립패, 동냥치, 각설이 등으로 폄훼돼 불리었지만 주지하듯이 각설이(覺說理)를 말 풀이하면‘깨달음을 설파하는 사람’이다. 양반 중심의 조선봉건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백성들의 새 세상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오늘의 일부 개신교가 권력과 가까워지면서 신을 섬기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물신을 가까이 하듯이 불교 또한 신라와 고려의 중흥기 때 세속의 단맛을 음미하다가 억압받을 때에 이르러서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자 했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했던 성종과 연산군 때에 출가를 하거나 불교를 믿는 백성들이 많았으며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시절 개신교인들이 가장 많이 증가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초기에 승려들이 직접 걸립(乞粒)에 나서는‘중매구패’나 사판승들이 이끄는‘사당패’는 천수경(千手經) 같은 불경으로 벽사진경을 하거나 백성들이 잘 아는 가락에 교리(敎理)를 사설로 붙인 회심곡(回心曲) 같은 평염불을 불렀다. 나중에는 덕담으로 기원하는 화청(和請)이나 고사염불(告祠念佛) 그리고 비나리(고사문서(告祀文書)의 순우리말)로 점차 바뀌어 가게 된다.

16∼17세기까지도‘깨달음을 설파하는 집단’이었던 사당패가 18세기에 이르러 지방을 떠돌며 노래와 춤을 추던 유랑예인집단으로 성격이 바뀌어 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예술적 분야의 책임자를 맡았던 모갑이가 점차 사찰의 통제를 벗어나 지도자가 되고 불교적 색체보다는 안정적 수입을 보장하는 덕담과 연희적 기능을 강화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당패는 나중에 해의채(解衣債 )를 받는 매춘까지 하게 된다.

인도 또한 철학이 사라지고 수행 혹은 연행만 남은 아쉬람들이 늘어 가고 있다고 한다. 비하르요가스쿨의 대성공 이후 아쉬람을 사업적 수단으로 여기는 무리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침투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존재하는가? 나는 요즘 들어‘유토피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찾아가는 과정이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완성된 유토피아에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과정이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의 연속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니다. 현생을 바꾸는 실천 없이 화려한 이상만을 이야기하는 정치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의 유토피아는 백성들의 것이 아니다. 오직 그들만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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