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며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하나의 우주였습니다. 그 품은 그 어느 곳보다 아늑했고 두 다리는 나무처럼 듬직했지요. 당신의 품에서 자식들의 몸과 마음이 여무는 사이, 아버지는 늙은 고목처럼 하루하루 등이 굽었습니다. 그렇게 늙어버린 아버지를 볼 때 마음이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살거운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 아버지의 삶이 새삼 서럽습니다. 5월이면 더 목이 메는 이름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텔레비전과 바꾸고  싶습니다

미국 링컨대학 5만여명의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버지와 텔레비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질문의 내용도 당황스러웠지만 학생들의 대답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68퍼센트의 학생들이 선택한 건 텔레비전이었으니까요.‘텔레비전만도 못한 아버지’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으로서 존경받는 아버지의 자리는 이미 수년 전부터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넓은 등과 커다란 손으로 자식들을 감싸안던 아버지들이 왜 이렇게 자식들과 멀어진 것일까요?. 텔레비전처럼 시간을 보내주지 않으니까요.

아버지가 가정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알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아버지 10명 가운데 3명은 평일에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총 2시간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장시간 노동을 해야하기 때문이지요. 1주일 동안 60시간 넘게 일하는 아버지도 무려 31.7퍼센트나 됩니다. 혹시 아셨나요? 대한민국 아버지의 생활비 부담률은 거의 100%에 가깝고 세계 1위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세계 40, 50대 인구 사망률도 시계 1위입니다.

아버지가 고된 노동을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이유는 또 있습니다.

대학생들의 절반 가까이가 아버지에게 있었으면 하는 것으로 무엇보다‘재력’을 꼽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최상의 미덕이‘부자 아빠’는 아니라고, 정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의 지표는‘부자 아빠’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족을 위해 혹사 수준의 노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우리시대 아버지들은 절반이 넘게 본인 스스로‘좋은 아버지’라고 자부했는데 이것은 월 소득이 300만원이 넘는 고소득 가정일수록 높게 나타났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점수는 56점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돌볼 여유도 없고 생각할 겨를도 없던 우리의 아버지들이 아무도 먼저 말하고 싶지 않고, 아버지 또한 받고 싶지 않았을 성적표는 56점. 언뜩 봐서는 뜻 모를 두 자리 숫자가 전부였습니다. 행복자정재단이 2006년 전국 가장 400여명을 조사해서 발표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지수 수치입니다.

‘이것이 과연 자식들을 위해 한결같이 달려 온 내가 받아야 할 성적표인가?’어느 날 문득 날아 온 초라한 성적표에 수많은 아버지들은, 아마도 부정하기 힘든 긍정의 쓴 소주를 삼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대화하는 법을 모릅니다

그럼 하나를 연상해 봅니다. 야근과 회식에 찌든 아버지가 간만에 일찍 퇴근해서 머리가 굵어진 자녀들과 한 식탁에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일 정도로 굳어 있는 서로의 얼굴들. 식탁 위의 대화는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처럼 이어지지 못하고 뚝뚝 끊깁니다. 식구라고 하지만 함께 밥 먹을 기회가 없던 그들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찾기가 힘듭니다. 자식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출현이 불편하고 아버지는 어떤 말로 분위기를 이끌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특별한 사례가 아닙니다. 실제로 부모관련 웹 게시판에 숱하게 올라오는 한 집 건너 두 집 꼴로 펼쳐지는 살풍경입니다. 어느 덧 자식에게 아버지는 피하고 싶은 가시방석이고 아버지에게 자식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또 다른 상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 됐을까?’

길거리에서 회사에서 혼자 있을 때마다 담배 한 대를 물며 생각해 봐도 아버지는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세상살이에 지쳐도 아버지란 이름을 한시도 떼어버리지 않고 묵묵히 살아온 것이 죄라면 죄일까. 대답없는 물음을 잠시 접고 아버지는 오늘도 포장마차 소주 한잔에 시름을 섞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순간들을 되돌려 봅니다.

바로 자신을‘아버지’로 만들어 준 자식에게 처음 품었던 마음, 자식이 옹알이를 떼고 첫 단어를 입밖으로 내 맽을 때, 제 몸집만한 책가방을 둘러매고 학교에 처음 등교할 때, 어느 잡지의 조사에서 나타난‘아버지가 자녀들과 가장 함께 하고 싶었던 순간’들입니다. 일주일에 2시간도 함께 있지 못하고 생활비 부담에 사망률 1위를 자랑하는 우리시대 아버지들. 돈도 시간도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던 한때, 우리들의 아버지도 순수하고 열정적인 꿈이 있었겠지요, 이제는 가족과 자식에게 밀려 그 꿈이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인도 만트라(진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는 30cm도 안되는 거리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데 30년도 넘게 걸리는 사람이 있다고, 30년이란 세월은 너무 깁니다. 마음속에 품었지만 쉽게 꺼내지 못한 말, 우리들 대다수가 하지 못한 말, 오늘은 용기 내서 해 보면 어떨까요. 쑥스러워 차마하지 못하고 가슴에 품어 둔 한마디 말‘아버지 사랑합니다’

● 곽선희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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