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를 찾아서> - 영원한 챔프 박종팔

19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를 거쳐 우리고향, 우리나라 그리고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무안출신 권투선수 박종팔(45세)씨를 만나 보았다.
박종팔 선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고향에 온 듯한 착각을 일게 했다. 누구나 어려서 고향을 떠나면 고향의 멋과 삶들을 잊고 살아가기 마련이지만 유독 박 선수는 여전히 고향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꾸밈없는 차림새를 지니고 있어 그것이 그를 더욱 돋보이게 보이는 지도 모른다.
그는 40대 중반의 두딸을 가진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지만 무안에서 개구쟁이 시절을 보낸 그 모습 그대로 소년같은 때묻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박 선수는 1958년 전남 무안읍 매곡리 양립부락에서 (부)박인규씨와 (모)최말래씨의 4남 1녀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다. 박 선수는 무안 북초등학교 시절부터 씨름, 배구 등 군 체육대항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함으로써 스포츠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음의 갈등을 많이 겪고 그 당시 친적 동생이 사는 광주로 올라와 챔피언 체육관과 인연이 되어 권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권투를 시작한지 6개월 후 어느 날 사촌 동생 자취방에 기거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옥상에 올라가 광주시내를 바라보며 세상에 이렇게 많은 불빛이 있는데 나 한사람 누울 곳이 없다는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어 삶의 한계를 느끼고 농사를 지으려 마음먹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박 선수의 집은 유채농사를 지었고 그해 총 5가마를 수확했다고 한다. 그런데 1976년이 되던 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박 선수는 수확한 유채 중에서 2가마를 부모 모르게 팔아 무작정 상경 흑석동 사촌 형님 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런 박 선수의 아버지는 상경한 아들이 딱해서였던지 잊지않고 쌀을 보내주셨다고 한다.
우연히 아버지가 보내신 쌀을 찾으러 영등포역으로 가던 박 선수는 후일 권투로 명성을 날리게 된 노량진에 있는 동아체육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 박 선수는 사촌형집앞의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 선수는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월급은 3분의 1만 받을 테니 그 대신 오후3시∼5시까지만 저에게 시간을 빼주세요”라는 부탁을 하고 일을 하기로 했다. 주인은 흔쾌히 승낙을 했고 배달을 하면서 오후 2시간은 체육관에 가서 권투를 했다.
그 후 1977년 여름 전국 신인 권투대회에 도전했지만 참패를 당한후 그 해 11월 프로선수로 데뷔하면서 신인왕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1978년에는 일본에서 열린 한ㆍ일 교환전 에서 1회전 27초만에 상대선수를 KO로 시합을 끝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일본교포 두 노부부가 박 선수를 찾아와 “내가 평생 살면서 이렇게 통쾌한 시합은 처음 보았소”라며 박 선수를 데리고 2일 동안 일본관광을 시켜주었다고 한다. 1979년에 한국 챔피언이 됐고 1984년에 동양 챔피언을 거쳐 IBF챔피언에 재등급을 하였다.
IBF챔피언 당시 미국현지 시합에서 15라운드에 KO로 승리한 경우는 한국인으로서 처음 있는 쾌거였다. 8차 방어전 끝에 다시 IBF챔피언을 반납하고 1989년에 WBA챔피언이 되었고 2차 방어전에서 멕시코 선수와 시합 도중 버팅으로 이가 3개 부러지는 불운과 함께 쓰디쓴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 그 후 1990년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같이 많은 시합을 해오면서 53승 5패를 기록 했는데 패배했을 때의 원인을 자신의 불찰과 자만심 때문이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1984년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대우체육관을 운영하였고 1993년부터는 박 선수의 스승인 김현치 관장이 운영하던 동아체육관까지 인수해 현재까지도 후진양성을 하고 있다. 과거 중국집에서 일하며 운동할 때 비가 우수수 떨어지던 날 극장에 갔다 늦게 집에 귀가해 보니 문은 잠겨 있었고 남의 집이라 문 열어달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옥상에 올라서 내 집 한칸 없다는 서러움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 흑석동 자택은 안방 큰 것 하나 보고 사게 되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박 선수는 지금까지도 자기 분야가 전부여야 하고 미쳐야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신념하나로 살며 자녀들과 후배들에게도 프로의 기질을 가져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지금의 박 선수가 있기까지 눈물과 남다른 인내심으로 내조한 아내 김숙희씨의 공을 빼놓을 수가 없다고 한다. 박 선수는 그의 아내에게 마음고생을 많이 시킨걸 늘 미안해하며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잘났던 못났던 고향에 갈 때마다 정답게 맞이해 주는 고향 선·후배 님들이 항상 고맙고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짙어 간다고 말했다.
지난해 무안 군민의 날 전야제 행사로 한국3대 타이틀 매치를 고향에서 성황리에 마칠 수 있게 해 주신 선배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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