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을 새롭게 조명. 공원건립도...

장승을 보고 결코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퉁방울 같은 눈, 주먹 같은 코.
그러나 못생기면 못생길수록 미우면 미울수록 불규칙하면 불규칙할수록 장승은 장승 나름의 멋이 있다.
예로부터 민초들은 자신들과 벗하여 서로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 신상을 갈망해 왔다. 이에 나무 한구루, 끌 한자루로 예술적 기질은 없어도 모양껏 이목구비를 깎아 보고 그럴싸한 이름도 붙여주어 그들과 가장 친근한 신상을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주기적으로 공양을 하지 않아도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지 않고 찾아 뵈어도 싫은 소리나 군소리 한 마디 없이 꿋꿋이 서서 백성들을 보살피던 듬직하고도 건강한 신, 못났어도 어딘지 모르게 살붙이 같아 믿음직하기 까지 한 신, 장승은 이처럼 못난 생김새임에도 불구하고 ‘장승’또는 ‘벅수’라는 훌륭한 이름으로 줄곧 우리 곁에서 호흡해 왔다.

장승의 유래

우리민족은 원시시대에 이미 공동체로서의 생존을 위한 안전과 경제 생활의 충족을 위한 산천 제례와 풍년 기원, 벽사 진경의 신앙이 있었다. 그 신앙의 대상은 만물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음을 믿는 다신적인 만상이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장엄한 산천이 상급의 신이었다. 그러다가 신역의 범위와 거리를 좁혀서 부락 근처에 있는 나무와 돌 등이 신의 처소로 되어 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 뒤 사회계층의 분화와 함께 형성된 부락 연맹체 사회에서는 농경이 경제 생활에서 이전의 시대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자 택지와 농경지의 사적 소유가 이루어지고 수익 지역 침탈 문제가 부족 사이에 발생하였다.
부족사이에는 수익 지역을 협정하고 나무나 돌로 경계표지(계표)를 설정하여 외부의 침입자와 그로 인해 발생되는 병마, 역신 등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거목, 거석 등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장승은 부락을 수호하기 위하여 세워졌고 계표로서의 나무나 돌은 인간의 공작 기구가 발달함에 따라 수호 신상으로 조각되어 세워지기도 하였다. 계표인 선돌이나 돌무더기가 갖는 신체로서의 막연함을 벗어나 구체적인 신상을 실감할 수 있는 우상이 실현되었다.
초기의 벅수는 소박한 조각 솜씨로 선인의 얼굴을 새긴 단순한 인물형의 목상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회생활과 경제사정이 복잡해지고 유행병(천연두)과 외침 또는 흉년 등에 대항하는 복합적인 기능을 부여하게 되었고 따라서 형태도 그 신앙의 목적에 맞게 다양하게 만들게 되었다.

장승의 종류와 기능

장승을 세우는 이유는 한 마디로 쉽게 설명할 수가 없다. 장승은 맡은 바 임무 곧 기능에 따라서 이름이 구별되고 명문과 생김새, 서있는 위치 또한 달라진다.
이렇듯 기능 명문 행태 위치의 상호관계가 가장 중심이 되며 구분의 근본이 되는 것이 기능이라고 하겠다.
△부락수호장승=흉년 재앙 유행병 등을 가져오는 귀신이나 역신에게 겁을 주어 쫒아보냄(벅수 장신)
△방위수호장승=방위가 허한 곳에 각 방위에 해당하는 오방 신장을 배치하여 방위를 지킴(벅수 장생 장승)
△산천비보장승=풍수 도참설에 의하여 국기의 연장과 군왕의 장생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찰 주위에 세우는 것으로 얼굴이 없음(장생표)
△읍락비보장승=고을과 마을의 지맥이나 수구가 허한 곳을 다스리기 위하여 세움(벅수 장생 장승 수구막이)
△불법수호장승=사찰 입구에 세워 경내의 청정과 존엄을 지키게 함(장생 장수)
△경계표장승=농경과 수렵 및 땔감을 얻는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움(장생)
△노표장승=이정표 및 방두의 노신을 겸했던 제도적인 장생(장생 장승 후)
△성문수호장승=중국에서 오는 역병이나 재앙의 침입을 성문에서 제지함(벅수 장승 우석목)
△기자장승=득남과 풍요를 기원함(남근석)

무안군의 장승현황

무안군에는 지난 1987년 문화재청에서 민속자료 문화재로 지정한 장승촌 법천사장승, 성남의 석장승, 총지사지석장승, 발산마을 미륵당산 등 4곳에 각각2기씩 총8기 장승을 보유하고 있다.
법천사 장승은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재액과 잡귀를 막는 수문장으로서 절을 지키고 사역내의 살생과 나무채취를 금하며 사원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표적 기능을 가진 무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신앙석상이다.
조선인조(1623년∼1649년) 무렵 원명스님이 법천사 중창당시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남의 석장승은 후청마을 남문밖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마을에 들어오는 잡귀 잡신을 막아주는 수문신의 기능과 마을 사람들의 소원성취를 이루어 주는 수호신적 기능을 가진 신암석상이다.
후청마을에서는 음력 정월에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비는 당산제를 지내고 장승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거릿제를 지낸다. 이때 부녀자들은 합장을 하여 소원을 빌고 무녀나 단골아비가 축언을 하여 주기도 했다.
후청마을 당산제는 조선영조(1741년) 향약제 고문서 기록에 보임으로 장승도 이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1984년 5월 남산공원으로 장승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총지사지 석장승은 몽탄면 대치리 총지마을 뒤편에 총지사란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의 주춧돌만 남아있고, 마을 입구에는 부부장승이 도로 양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절은 통일신라시대 정명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고려시대 현종 7년에 증건하였지만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어 재차 증건하였으나 1810년에 다시 화재로 폐찰되었다. 이 부부 장승을 이 마을에서는 마을을 지키고 잡귀를 막는다 해서 수문장으로 여기고 있다.
발산마을 미륵당산은 장승이 당산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로 구성되어 있다.
당산할아버지는 벙거지형 모자를 쓰고 얼굴은 길쭉한 편으로 불상과 흡사한 모습이며, 당산 할머니는 자연 입석으로 조각흔적이 있다.
발산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보름에 이곳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 장승은 불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것으로 조선시대 민간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외에도 무안은 지난 1999년 일로읍 회산 연꽃방죽에 백련만 있는 것을 감안.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목장승 144여개를 세워 관리하고 있다.

함평군의 장승현황

함평군은 나산면에 문화재 지정 목장승 총3기가 있으며, 장승공원·나르뫼공원· 소백이공원 등에 각 지역의 특색을 띄는 장승들을 관리하고 있다.
이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삼축리에 위치한 전통장승공원이다. 전통장승공원은 3년전 나산 면장 나홍채씨가 전국을 돌며 모은 석장승 사진자료들을 토대로 목장승으로 다시 재현해 놓은 곳이다. 이 공원에는 전국의 주요장승 36기가 한곳에 재현되어 있다. 때문에 함평 전통장승공원을 방문한 사람들은 전국에 있는 모든 석장승들을 모두 볼 수 있다.
나산면 나살리에 소재한 나리뫼공원은 솟대49기 장승65기 조탑2기 원두막 3개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리뫼공원 장승은 마을의 특색, 생산물, 산과 하천 등에 따라 읍면장승 마을장승 산천장승 등 3개로 구분된다.
읍면장승은 1개읍 8면의 특색이나 특징을 묘사한 것으로 함평읍-세발낙지, 손불면-엽삭젓 물고기 파도, 신광면-동백꽃 빙어, 학교면-달 학 고막석교 철길, 엄다면-남도노동요, 대동면-황금박쥐 달, 나산면-잉어 붕어, 해보면-붓(윤황소붓), 월야면-구름 달 등을 나타내고 있다.
마을장승은 나산면에서 생산되는 주요 농·수·축산물을 리별로 묘사한 것이다. 삼축리-화훼, 수하리-젖소, 나산리- 참외, 신평리-고추, 송암리-고추, 이문리-돗자리, 수상리-누에, 용두리-돗자리, 우치리-딸기, 초포리-메주, 월봉리-한우, 원선리-산나물, 구산리-양파, 덕림리-마늘.
산천장승은 나산면내 높은 산 7곳과 이곳에서 발원하는 하천 8곳을 뜻한다.
여기에는 천주봉대장군 평능천여장군 월봉천여장군 국사봉대장군 수하천여장군 옥녀봉대장군 고막천여장군 메봉대장군 구산천여장군 등이 포함된다.
나산면 이문리에 위치한 소백이 공원은 팔도장승이 소재해 있으며, 이는 남북통일기원과 동서화합 등의 염원이 담겨 있다.

장승역할의 변화

1988년에 접어들어서는 동북아시아 공산권과의 교류정책인 북방외교가 활발해지고 동서화합과 개혁 바람을 타면서 통일에 대한 국시 논쟁이라든가 실제적인 북한 실정에 관한 의문, 그리고 남북한 청년 학생 회담의 시도 등의 계기를 통하여 통일을 주제로 한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맞추어 각 대학에서는 통일을 의미하는 상징물 또는 통일을 기원하는 신앙체로서의 장승을 깎아 세우기 시작하였다. 교정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통일의 뜻이 담긴 명문의 장승을 만들어 세움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뜻을 새김질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통일뿐만 아니라 민주, 자주 여성해방, 학교발전을 기원하는 장승도 함께 세워 전반적인 교내외의 소원을 빌었다.
또 1988년 지리산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1990년까지 문경새재, 계룡산 등지에 민족통일 대동 장승굿 추진위원회의 주관으로 민족 통일 남장승, 민족 평화 여장승이 세워졌다.
장승의 역할이 여기서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까지 확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동의 범위도 부락 단위, 학교 단위에서 각 사회모임이나 생산 업체 또는 군이나 도단위로 넓혀져 각 단체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명문화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서 정진하는 모습을 장승의 표정에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지역과 지역 사이의 경계에도 서로의 불신을 없애고 믿음과 더불어 상부 상조한다는 의미의 장승을 세워 기존의 지역 감정을 해소해 보고자 하는 경각심을 일깨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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